드라마라면 꼬박 일주일에 여섯개씩 챙겨보기까지 했던 내가 드라마계를 떠났던 것은 이웃들의 사연을 궁금해하지 않게된 언젠가부터였다. 그러다 최근 MBC의 “하얀거탑”과 “거침없이 하이킥!”의 열풍을 듣고 ‘하나TV를 통해 내가 편한 시간에 볼 수 있게 되면서’ - 광고 맞음! - 한두 편 훑어보다 결국 열심히 챙겨보게 되었다. 병원 이곳저곳을 유연하게 누비는 연출도 뛰어나고, 진짜 병원사람들 같은 적절한 캐스팅들이 연기도 잘한다. 결정적으로,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간지러워 할 부분을 잘 긁어주는 드라마이기 때문인 듯 싶다.

하얀거탑

과장선거를 둘러싼 암투를 다루는 전반부는 그야말로 ‘줄싸움’, ‘라인’의 행태를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선거를 위한 철저한 유권자 포섭, 사과가 들어있지 않은 사과박스, 배신, 친인척 빽, 스폰서, 동창회, 유학파 …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며 지내는 바로 그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또한, 드라마는 과장이 되고난 후의 시퀀스들에서 그가 왜 과장이 되어야만 했는지 잘 보여주었다. 명찰과 명패가, 사무실이 한 과의 “장(長)”으로 바뀌고, 인사권, 구매권 등 막강한 이권이 생기고, 수술 중에 듣는 음악마저 바뀌는, 그것은 바로 장준혁 시대의 도래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회진 시의 그 권위라니, 많은 수컷들은 ‘남에게 결재서류를 던져보고 싶은 로망’을 가슴에 품고 살지 않던가.

회진

의료사고가 터지면서 장준혁이 지금까지 달려온 자신의 여정을 회상하는 장면은 공든 탑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이 정치생활(?)의 절절함을 잘 보여준다. “발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란 김창완의 멘트, 인생에는 그런 선택의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 또 사람이 하는 일이란 대개 비슷비슷하기에 정치 행위가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드라마의 완소남, 최도영 선생이 열심히 쟁취의 인생을 살아온 장준혁 씨와 대비되며 제시된다. 따뜻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외모에 등장하는 장면의 절반은 현미경만 보고 있는 성실파, 한 명의 어린 환자를 위해 눈물 흘리는 휴머니스트, 게다가 정의롭기까지 하다.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설들도 많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니 너무 우리살이가 팍팍하잖아? 우리팀의 Y대리와 외모도 성격도 닮은 최도영 선생 만세!

최도영 선생

엄마가 김창완 씨가 악역을 잘 하느냐고 묻기에 나는 “악역인가? 글쎄, 다들 저러고 아둥바둥 살잖아.”라고 대답했다. 의료사고 문제가 떠오르며 선악 대결구도로 흐르면서 드라마의 갈등 양상이 조금 진부해지려고 하는 것이 염려스럽지만, 이 드라마는 선과 악을 모호하게 구분지어 끌고온 것도 장점이다. 그래, 과연 어디에 패거리 문화가 없던가? 내 자식만큼은 그 “라인”을 잡게 해주려고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부터 외국어를 서너 개 씩 시키고, 빚 지고라도 고액과외 시켜 명문대에 보내려고 기를 쓰지 않는가? 어디 똑똑한 사람이 부족해서 이 세상이 이리 각박할까. 그러한 카르텔들이 먹어도 너무 자기들끼리만 먹다보니 이런 세상이 아니던가.

인상적인 ost, 바비킴의 “소나무”를 들으면서, 드라마가 끝나면서, 우리는 최도영 선생을 흠모하다 다시 일상에서 장준혁 씨로 돌아온다. 내일 아침이면 빵쪼가리 하나 먹고 만원버스 타고 출근해야한다. 꼴도 보기 싫은 상사에게 애써 친한 척하며 술도 마셔줘야 하고, 약한 직원에게는 흰 소리도 부려본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우리도 장준혁이처럼 열심히 계속 가보자꾸나. 우리가 처음 길을 나설 때 우리는 같이 푸른 빛이었는데, 너는 오늘도 푸른데, 나는 오늘 무슨 빛일까? 근데 우리는 왜 열심히 해야하지? 내가 뭘 하려고 했었더라.

정말 그럴싸한? 꼬봉같은.

덧. “상호텍스트성” 같은 진지하고도 중요한 이론을 빌려, 여기서는 이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 컨버전 드라마라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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